"배가 고파서 돌아왔다"는 혜원의 말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삭막한 서울살이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과 그의 친구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임용시험에 떨어지고, 남자친구와는 사이가 멀어졌으며, 아르바이트 하던 편의점에서 가져온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으로는 도저히 배를 채울 수 없는... 답답한 서울생활. 큰 짐가방을 매고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 눈 쌓인 마당을 저벅저벅 걸어 들어와 아무도 없는 빈 집 마루에 철푸덕 누운 혜원이 많이 지쳐보였습니다. 저도 혜원과 비슷한 과를 졸업하고 시험을 보지 않은 채 방황하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더 이 영화에 몰입되었던 걸까요?
돌아온 그녀가 처음으로 먹은 배추국을 시작으로, 수제비, 배추전, 팥시루떡, 막걸리, 파스타, 크렘브륄레, 떡볶이, 콩국수, 밤조림 등... 계절에 따라 음식 재료에 따라 정말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먹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친구들 은숙, 재하와 함께 음식을 나눠먹고 여름밤엔 고동을 잡으며 자잘하고 행복한 추억도 만들어가죠.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계절이 흘러가며 혜원은 점점 허기졌던 마음을 채우는 듯 했습니다. 봄에는 모를 심고 여름엔 잡초를 뽑고, 가을엔 추수를 하며 바쁘게 지내는 혜원에게 어느 날 재하가 건넨 조용하지만 태풍같은 말 한 마디.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돼?"
혜원은 외면했던 현실을 직시합니다. 먼저 흐지부지 관계를 끝맺음 하지 못했던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제대로 헤어지고, 축하한다는 말도 전합니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올라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족했던 통장도 채우죠. 재하가 말한 '아주심기'를 준비하는 혜원.
다시 계절은 바뀌고 집으로 돌아온 혜원. 그녀가 자전거를 타고 푸른 산과 들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갑니다. 강아지가 짖어대는 집엔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창문이 활짝 열려있는걸로 보아... 아마 혜원의 엄마가 돌아온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관객에게 심어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N번 관람의 이유, 따뜻한 영상미
저는 <리틀 포레스트>를 아주 여러번 '감상'했는데요. 주로 일상에 치여 피로감이 누적되었을 때, 해야할 일을 모두 끝내고 거실의 조명을 다 끈 채 편안하게 쉴 수 있을 때 이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지친 혜원을 감싸주고, 배불리 먹여주는 음식들. 그 음식을 차리는 모습을 담은 영화의 장면들이 매우 아름답게 연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일본의 만화를 원작으로, 같은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도 있습니다.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는 우리나라의 사계절과 음식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어요. 농촌에서의 혜원의 삶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함께 달라집니다. 허투루 쓰이는 시간이 없이 바쁜 봄,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에 진한 초록색으로 변한 산과 들판, 태풍이 휩쓸고간 논과 밭에서 한숨쉬는 가을의 어떤 날들, 온세상이 하얗게 변한 겨울 풍경까지... 딱 그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색감과 소리들을 영화에 잘 녹여낸 것 같아요. 마치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눈이 편안한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영상미는 지친 저에게 편안함과 위로를 건네줬어요. 그리고 색색의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화면에서 그 온도와 음식 향까지 나는 것 같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에너지를 충전해 줍니다.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겨울 배추국과 친구들과 나눠 마시는 막걸리까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음식문화가 아주 정갈하고 예쁘게 화면에 담겨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즐겁게 합니다. 솔직히, 다들 밤조림 만드는 장면에서 입에 군침이 싹-돌면서 한 번쯤 만들어 먹어보고싶단 생각 하셨죠?
나만의 작은 숲은 어떤 모습일까?
혜원의 가족은 아빠의 병과 요양 때문에 시골에 내려와 살게 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엄마는 혜원과 함께 시골에 남았습니다. 엄마는 혜원을 이 곳에 뿌리내리고 살게해주고 싶었다고 하죠. 제 생각엔 꼭 정착하라는 뜻은 아닌 것 같아요. 자연속에서 자라며 자신만의 안식처, 곧 작은 숲을 만들고 딸이 힘들 때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곳의 자연이 혜원을 키운거라고 말하는 엄마. 혜원이 지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의 작은 숲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엄마의 바람이 이루진것 같네요.
영화의 마지막쯤, 우리는 다들 생각합니다. '작은 숲은 어떤 의미일까?'
저는 영화에서 말하는 '리틀 포레스트'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는 '자연'입니다.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 땅이 바로 자연이라고 생각해요. 울창한 숲과 바람, 깨끗한 물과 공기는 늘 우리 곁에 있는 것 같지만, 이제 의식적으로 찾지 않으면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이 되고말았습니다.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자연을 배제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호흡하고, 산과 바다가 주는 자연의 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합니다. 요즘 캠핑이 유행인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자연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죠. 혜원처럼 시골집은 없지만 작은 텐트를 갖고 산과 바다에 있는 자기만의 작은 숲을 찾아 떠납니다.
제가 생각하는 두 번째 '리틀 포레스트'의 의미는 '자립'입니다. 좀 엉뚱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저는 혜원이 집에 돌아와서 자기 손으로 음식 재료를 장만하고 밥을 지어먹는 모습에서 강인한 면모를 느꼈습니다. 통장에 돈이 점점 없어지면서도 친구에게 쉽게 빌리지 않고, 고모를 도와드리며 열심히 일합니다. 누구도 그녀에게 부지런히 일하고 챙겨먹으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살뜰히도 스스로를 챙겨 먹입니다. 친구들에게 맛있는 떡과 술도 대접하죠! 저는 이러한 자립심, 부지런함이 삶에 대한 애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크고 작은 실패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은 힘 없이 그저 먹지도, 일하지도 않고 누워있거든요... 하지만 혜원은 자신만의 작은 숲에서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합니다. 잘 챙겨 먹고, 또 열심히 일하면서요!
<리틀 포레스트2> 제작해주세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팬이라면 당연히 2편이 제작되길 바랄 것 같은데요. 여러 번 영화를 보면서 2편이 나온다면 어떤 내용일지 상상해보았습니다.
1.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 혜원이 만들어갈 제 2의 삶 - 영화에서 엄마와 혜원이 각자의 감자빵 만드는 방법을 편지로 남겼던 에피소드를 기억하시나요? 혜원이 어릴 땐 엄마가 해주는 요리를 먹기만 했는데 어른이 된 혜원이 자기만의 레시피로 만드는 요리를 엄마와 나누는 모습. 그리고 가출(?)했던 엄마가 바깥 세상에서 새로 배운 요리를 혜원에게 해주는 모습을 보고싶습니다.
2. 이것이 바로 K-밥상이다! -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생각보다 우리가 흔하게 먹는 상차림이 등장하지 않아요. 쌀밥과 된장찌개, 김치찌개, 계란말이와 각종 나물들... 한 끼 정도는 일상에서 정말 많이 접하는 한국 밥상차림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현실 자각 타임과 청년들이 이끌어가는 농촌 - 저는 영화에서 재하가 우리에게 던져준 메세지가 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것들을 미룬 체 다른것만 볼 순 없죠. 생계문제에 부딪힌 혜원이 친구들, 동네 사람들과 합심해 농촌마을의 변화를 싹틔우는 장면이 들어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농촌의 젊은 인력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아요!
4. 혜원과 재하의 로맨스 - 솔직히 다들 영화 보면서 재하가 혜원이 좋아하는 거 눈치 채셨죠? 재하가 혜원의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 전 여자친구에게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라고 말하는 재하의 모습 등... 청춘들의 이야기에 로맨스가 빠질수 있나요! (은숙이 미안해, 눈 감아)
저에게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그 자체로 저만의 '작은 숲'이 되었습니다. 힘들도 지칠 때, 진짜 쉼이 필요할 때마다 찾는 영화니까요.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저의 작은 숲에 초대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